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 (문단 편집) == 고대 사료의 증언 == 로마 제국의 황실 일원들과 고위 관료들이 대거 학살당한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이에 관련된 기록은 놀라울 정도로 부실하다. 사건이 일어난 날짜와 장소, 경과, 범인의 정체와 동기 등을 명확하게 서술하는 기록은 단 하나도 없다. 그나마 이 사건을 전하는 사료들도 파편적인 정보만 제공할 뿐이며, 그나마도 저자의 입장에 따라 왜곡하거나 꾸며낸 이야기를 덧붙이곤 해서 진상을 파악하기 어렵다. 콘스탄티누스 1세 붕어 후 세 아들이 아우구스투스로 등극한 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339년 5월 [[에우세비우스]]가 죽기 직전에 출간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생애(Βίος Μεγάλου Κωνσταντίνου)>다. 이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임종을 맞이할 때 주교들과 군인들 앞에서 제국 전체를 세 아들에게 나눠주겠다는 유언을 남겼으며, 그가 죽은 후 제국 전역의 모든 군대가 "초자연적인 영감을 받은 것처럼" 하나로 행동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들들만 로마의 황제로 인정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그들을 곧바로 아우구스투스로 추대했다고 한다. 여기에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이 한 목소리로 "그의 아들들만 아우구스투스가 될 자격이 있고 다른 사람들은 그럴 수 없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또한 에우세비우스의 <콘스탄티누스의 생애> 초판에 실린 콘스탄티누스의 재위 30주년 기념 연설에서는 자신의 앞에 있는 4명의 카이사르를 묘사하는 구절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이후의 사본에서는 카이사르는 3명 뿐이고, 지상에서도 [[삼위일체]]가 실현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듯 에우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세 아들이 순조롭게 황위를 물려받았다고 기술하면서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처리했다. 그 다음의 초기 사료는 리바니우스와 [[율리아누스]]에 의해 행해진 원로원 연설이다. 리바니우스는 344년 또는 345년 콘스탄티누스가 사망한 뒤 콘스탄티우스 2세와 콘스탄스에게 황권이 이어질 때[* [[콘스탄티누스 2세]]는 340년 콘스탄스와 전쟁을 벌이다가 전사한 뒤 [[기록말살형]]에 처해졌기에 언급되지 않았다.] 그 어떤 사건도 계승자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면서, "정부는 질서를 유지했고, 그들에게 부여된 것을 지키기 위해 후계자들이 폭력을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다소의 위기'가 있었다고 언급했지만, 계승자들이 용감하게 문제를 해결해 제국을 훌륭히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율리아누스는 355년 또는 356년 원로원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반역자 [[마그넨티우스]]를 토벌해 제국을 안정시키는 것을 칭송하는 연설을 했다. 이때 그는 콘스탄티우스가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제위를 계승받은 상황을 언급했다. 그는 콘스탄티우스가 그의 형제들, 시민들, 그의 아버지의 친구들, 그리고 군대에 대해 "정당하고 온건하게" 행동했다고 설명했으며, 페르시아 전쟁이 시작된 배경에서 콘스탄티누스의 죽음으로 인한 정치적 변화의 결과로 군대가 큰 혼란에 빠졌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병사들이 콘스탄티누스를 추모하면서도 콘스탄티우스를 자기들 입맛에 맞게 통제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콘스탄티우스가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사망 후 "혼란, 심각한 전쟁, 많은 습격, 동맹국의 반란, 군인들 사이의 규율 부족, 그리고 그 당시의 다른 큰 어려움" 등 온갖 다양한 위험에 처했다고 밝혔다. '전쟁'과 '습격'은 337년 페르시아의 니시비스 공성전과 [[사르마티아]]의 다뉴브 이남 침공을 의미하며, 동맹국은 아르메니아를 암시한다. '군인들 사이의 규율 부족'은 군대가 콘스탄티누스 사후 반기를 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장례식을 치른 뒤 시리아로 돌아가기 전에 반란이 끝나고 질서가 회복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콘스탄티우스가 그의 적들, 콘스탄티노폴리스, 형제들, 그리고 친구들을 잘 대우했다고 덧붙였다. 이렇듯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고 언급 자체를 기피하는 태도마저 감지되는 것을 볼 때, 이들이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음을 암시한다.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와 율리아누스의 아버지인 율리우스 콘스탄티누스 또한 기록 말살형에 처해진 것으로 보인다. 갈리아에 세워진 콘스탄티우스 갈루스를 기리는 비문 2개에는 갈루스가 누구의 "아들(filius)"이었는지에 대한 기술은 빠지고 오직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콘스탄티우스 피우스 아우구스투스]]의 손자"로만 묘사되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콘스탄티우스의 책임을 묻는 기록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에우트로피우스]]에 따르면, 콘스탄티우스 2세는 군대의 강한 압력을 받고 어쩔 수 없이 달마티우스를 죽이는 것을 용인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달마티우스는 매우 유망한 재능을 가졌고 삼촌 콘스탄티누스를 매우 닮았으며,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세 아들과 달마티우스를 후계자로 두었다고 명시했다. 실제로 콘스탄티누스가 그를 최전선인 다뉴브 방면군의 지휘를 맡긴 것을 볼 때, 그는 군인들에게 인정받을 정도로 군략을 갖췄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건이 벌어졌을 당시에 비미나키움에서 콘스탄티우스 2세를 접견한 적이 있었던 [[아타나시오]]는 사적으로 작성한 문서에서 콘스탄티우스가 친족들을 잔혹하게 처형했다고 기술했다. 361년 여름 또는 가을에 콘스탄티우스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율리아누스는 아테네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콘스탄티우스를 "아버지, 형제, 사촌들의 살인자이자 사실상 우리의 모든 공통된 가족과 친척들의 처형자"라고 부르며, 자신의 친족들을 잔혹하게 죽였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콘스탄티우스는 자신과 갈루스도 죽이려 했다가 결국 유폐시켰고, 아버지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 계모 갈라의 재산을 몰수해버려서 친어머니 바실리나의 집만 남았다고 덧붙였다. 또한 그는 편지에서 궁정 사람들은 자신에게 콘스탄티우스가 그 사건에 죄책감을 느껴 회한에 사로잡혔다고 알려줬다고 주장했다. 그가 아이를 갖지 못한 것과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잘 풀리지 않은 것은 과거에 저지른 죄악 때문이라는 것이다. 율리아누스는 이런 과거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콘스탄티우스에게 충성을 바치고자 노력했다면서, 형 갈루스가 처형된 것은 그가 저지른 폭정 때문이니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갈루스가 그렇게 되어버린 것은 초년기에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앞서 콘스탄티우스에게 찬사를 보내는 연설을 했던 적이 있었던 리바니우스는 율리아누스의 장례 연설 때 콘스탄티우스가 율리아누스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살해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가 자신을 카이사르로 삼겠다고 제안했을 때 음모를 의심했다고 덧붙였다. [[조시무스]]가 저서 <새로운 역사>에 인용한 에우나피우스의 <역사>에 따르면,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가 최초로 죽임을 당했고, 뒤이어 달마티우스, 옵타투스, 한니발리아누스가 살해되었다고 한다. 또한 콘스탄티우스는 병사들에게 콘스탄티누스의 아들들 외에 다른 통치자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에우나피우스는 후기 작품인 <소피스트들의 삶>에서 아블라비우스 역시 암살극이 벌어진 지 얼마 후 자기 영지에서 반역 혐의를 뒤집어쓰고 살해되었는데, 이것 역시 콘스탄티우스의 악행이라고 덧붙였다. 에우나피우스는 306년 콘스탄티우스 1세 클로루스가 사망한 후 근위대가 "콘스탄티우스의 적법한 자녀 중 누구도 황관에 합당하지 않다"며 콘스탄티누스를 후계자로 선택했다는 내용도 실었다. 여기서 콘스탄티우스의 적법한 자녀는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의 아들들이다. 이는 337년 그들이 다시 권력을 승계받지 못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창조된 이야기로 여겨진다. [[조시무스]]는 에우나피우스의 글을 인용하는 한편, 콘스탄티누스 1세가 병이 아니라 이복형제들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헛소문이 돌자, 콘스탄티누스 1세를 추앙하던 군인들이 분노하여 황실의 일원들을 모조리 살해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헛소문을 퍼트려 군대를 선동하고 학살을 주도한 이가 콘스탄티우스 2세라고 지목했다. 자신과 두 형제만이 제국을 통치하게 하도록 이같은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나치안수스의 그레고리우스는 380년 아타나시오를 찬양하는 연설에서 콘스탄티우스가 치세 동안 변명의 여지 없는 3가지 범죄를 저질렀다며, 그 중 첫번째로 가족을 살해한 것을 들었다. 히에로니무스는 아블라비우스가 많은 귀족들"과 함께 살해당했다면서, 황족 외에도 많은 귀족들이 이 사건 때 살해되었음을 암시했다. 385년에서 390/91년 사이에 를 집필한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콘스탄티우스의 잔인함은 [[칼리굴라]], [[도미티아누스]], [[콤모두스]]를 능가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콘스탄티누스의 이복 형제와 조카들이 살해된 이유는 권력을 독점하려는 콘스탄티우스의 음모 때문이라고 서술했다. 암미아누스는 군대의 폭동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5세기의 신학자이자 역사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는 콘스탄티우스가 두 이복 사촌들(콘스탄티우스 갈루스, 율리아누스)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이 누그러지자 그들이 교육을 받도록 허용했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테오도레투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가 찬탈이 두려워 친척을 죽였다고 기술했다. [[티란니우스 루피누스]]는 콘스탄티누스가 임종을 맞이하기 직전에 후계 계획을 수정했다고 주장했다.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를 배제하고 세 아들에게 제국을 맡기기로 한 당사자가 바로 콘스탄티누스이며,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파]] 관료로부터 아버지의 유언장을 전달받은 뒤 이에 따랐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콘스탄티우스가 아리우스파를 확고히 지지한 것은 자신의 승계를 도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필로스토르기오스]]는 콘스탄티누스가 사산 왕조와의 전쟁을 치르러 가던 중 니코메디아에서 이복 형제에게 독살당했으며, 콘스탄티누스는 죽기 전에 자신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해달라는 유언장을 적어서 니코메디아 주교 에우세비우스에게 맡겼고, 에우세비우스로부터 이 유언장을 받은 콘스탄티우스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살육을 벌였다고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